최근 아르헨티나, 터키의 금융위기가 우리나라에 미치는 직접적인 파급효과는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이머징 마켓의 투자 위험이 새롭게 인식되면서 당분간 외국인 투자자금의 유입 부진과 환율 및 증시불안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7월 초순 아르헨티나와 터키에서 촉발된 금융위기의 여파로 혼란에 휩싸였던 개도국 금융시장이 최근 다소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다. 그러나 향후 개도국 금융 불안의 재발 가능성이 잠복해 있는 상태이다. 아르헨티나와 터키의 위기를 야기한 근본 문제의 해결이 요원해 보이는 데다, 장기화되고 있는 세계경제 침체로 인해 수출의존도가 높은 개도국 경제가 상당히 취약해져 있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와 터키 금융위기의 향후 전망과 여타 이머징마켓으로의 전염 여부, 그리고 우리나라에 미치는 파급효과를 점검해 본다.
금융불안의 직접적인 계기는 봉합
터키와 아르헨티나의 금융위기는 이미 지난해부터 표면화된 것으로, 지난해 12월 IMF가 대규모 자금지원을 결정함으로써 간신히 국가부도의 위험을 넘길 수 있었다.
최근 다시 이들 국가에서 위기국면이 조성된 직접적인 계기는 터키의 경우 7월3일로 예정되었던 IMF의 자금지원이 연기되었던 데 기인한다. 터키정부가 민영화 대상인 터키 텔레콤의 경영자로 민간전문가를 기용하겠다는 IMF와의 합의를 어긴 때문이었다. 결국 터키 정부가 IMF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함에 따라 7월 12일 IMF의 15억달러에 달하는 자금지원이 결정되면서 폭등했던 환율이 안정되고 금융시장 혼란은 다소 진정되는 분위기다.
아르헨티나는 지난 7월 10일 8.8억달러의 재무성채권(3개월물)을 발행하면서 14%의 고금리를 적용한 것이 위기국면을 야기한 시발점이 되었다. 재무성증권 발행금리가 6월의 8%에 비해 크게 높아짐에 따라, 고금리하에서 채무상환이 순조로울 수 있을 지에 대한 의구심이 투자자들 사이에 확산된 것이다. 아르헨티나 역시 11일 공공부문의 임금 및 연금 삭감을 골자로 하는 재정감축 계획을 밝히면서 금융시장이 다소 안정세를 되찾을 수 있었다.
금융불안의 근본 원인은 미해결
아르헨티나와 터키의 위기 상황이 단기적으로는 봉합된 것으로 보이지만, 근본적인 문제점들이 해결되지 않는 한 위기 재발의 위험성은 상존한다고 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와 터키 모두 장기간 재정적자가 지속되면서 누적된 정부채무가 심각한 상황이다. 특히 재정적자 보전을 위해 외화채권 발행에 과도하게 의존한 점이 현재의 위기를 잉태한 요인이 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전체 외채 1468억달러(3월말 현재)의 60% 가량을 정부부문이 차지하고 있고, 터키 역시 정부부문 외채가 전체 외채(3월말 현재 842억 달러)의 40% 이상에 달하고 있다.
따라서 문제 해결의 핵심은 재정부문의 건전화에 달려 있다. 하지만 경제성장률이 크게 높아지지 않는 한, 재정개혁을 단행하더라도 재정적자 축소가 제대로 이루어질 지 장담하기 어렵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98년 이후 3년째 경기침체가 장기화되고 있는 데다, 야당의 반발과 정치사회적 갈등으로 인해 재정감축 계획의 실행과정에서부터 많은 난항이 예상된다.
두나라 모두 고정환율제도를 장기간 채택함으로써 통화가치의 고평가를 야기한 점도 위기발생의 중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고정환율제도를 취하고 있는 나라들이 외환위기에 취약하다는 점이 두 나라에서도 여실히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지난 1991년부터 페소화를 달러화에 대해 1:1로 고정하는 커런시보드(Currency Board)제를 채택함으로써 1990년대 중반까지 인플레 안정과 고성장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한때 환율정책의 성공적인 사례로 국제적으로 칭송받기도 했다. 그러나 장기간의 환율고정은 페소화 고평가와 무역수지 악화를 야기함으로써 위기국면을 야기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특히 1999년 1월 브라질 레알화의 평가절하는 아르헨티나 페소화의 고평가를 더욱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터키 역시 고정환율제를 유지해 오다가 지난 2월 22일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변동환율제로 전환하였다. 이후 터키 리라화는 불과 5개월 사이에 50% 가량 절하된 상태이다.
아르헨티나와 터키는 IMF지원 프로그램이 가동중이어서 당장은 채무불이행을 선언할 가능성이 높지 않아 보인다. 미국이 아르헨티나 지원에 미온적인 입장이지만 자국경제에 미치는 파장이 커질 경우 태도를 바꿀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빠른 시일내에 이들 나라의 경제상황이 호전되지 않거나 재정감축 등 경제개혁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는다면 국가부도의 위험성은 상존한다고 할 수 있다.
금융불안 확산 가능성은 크지 않아
금융위기가 아르헨티나와 터키에 국한되지 않고 여타 개도국으로 전염되어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발전될 경우 세계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이러한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아르헨티나, 터키의 경제불안은 장기간 지속되어 온 것이어서 국제투자자들이 이미 상당부분 대비를 해온 데다, 지난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국제금융시스템이 강화된 때문에 국제금융시장 전반의 위기로 비화될 것 같지는 않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국제투자자들이 이머징마켓에 대한 투자를 꾸준히 줄여 온 점도 이머징마켓으로부터 일시적인 대규모 자금이탈에 따른 위기발생의 가능성을 줄여주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개도국으로의 자금유입은 주로 직접투자와 포트폴리오 투자로 이루어져 왔으며, 대출은 대규모 감소세를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최근 일부 개도국의 금융위기는 열악한 재정사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선진국 금융기관들이 급작스럽게 이머징마켓으로부터 대출금을 회수하면서 나타난 1997년 이머징 마켓의 위기와는 성격이 달라 보인다. 또한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개도국의 외화유동성이 전반적으로 개선된 상태여서 당장 외환위기의 위험에 빠져들만한 나라가 많지 않다.
하지만 중남미 및 동구지역의 경제상황이 취약한 일부 국가들의 경우, 외환위기로까지 악화되지는 않더라도 아르헨티나와 터키의 금융불안이 재연될 때마다 금융시장 혼란이 계속 야기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아르헨티나와 인접한 브라질의 경우 과다한 재정적자 및 정부외채 부담 등의 면에서 아르헨티나와 동일한 상태여서 아르헨티나 위기에 바로 전염될 수밖에 없는 취약한 상황이다. 실제로 최근 브라질 레알화 환율이 아르헨티나 위기와 더불어 폭등세를 나타내고, 이를 방어하기 위해 브라질 중앙은행은 금리인상을 단행해야만 했다.
아시아 개도국들의 경우 1997년에 비해 외환방어능력이 크게 개선된 상태이고 경상수지가 대규모 흑자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남미 국가나 터키와는 다르다. 최근 개도국 금융불안의 와중에서도 아시아 개도국의 환율은 상대적으로 소폭 상승하는데 그쳐 개도국 금융위기에서 한발 비껴나 있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과다한 외채부담과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는 인도네시아가 어려워 보이고, 고정환율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말레이지아는 통화가치 고평가 부담이 끊임없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개도국들간에 장기적으로 펀더멘털의 차이에 따라 차별화될 가능성이 있지만, 당장은 일부 개도국의 금융위기가 이머징마켓에 대한 위험도를 높여 투자위축요인으로 작용할 것임은 분명하다. 개도국들은 당분간 해외투자자금의 유입 부진과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경기침체라는 이중고를 공통적으로 겪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 경제에 미칠 파급효과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중남미 지역과 터키에 대한 우리나라의 교역 및 투자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아르헨티나 및 터키의 금융위기로 인한 직접적인 파급효과가 작을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금융시장도 최근 개도국 금융위기의 여파로 인해 크게 흔들릴 조짐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7월 들어 국제금융시장에서 중남미 외화채권의 가산금리가 가파르게 상승했지만, 한국 외평채의 가산금리는 비교적 안정된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 대한 국제투자자들의 인식이 차별화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6~7월중 외국인 주식투자자금이 유출되고 있지만, 아르헨티나 사태에 영향받은 것이라기보다는 미국의 경기회복 지연, 증시폭락 등에 기인한 것이다. 실제로 과거 원화환율도 중남미 통화와의 상관관계가 높지는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금년 들어 수출부진을 타개하기 위해 대체시장으로서 중남미 지역에 대한 수출 증대 노력을 기울여 온 점을 감안할 때, 향후 중남미에 대한 수출 위축은 전반적인 수출회복을 더욱 어렵게 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일부 개도국의 금융위기가 미국을 비롯한 세계경제의 회복을 지연시켜 국내경기 회복에 장기적인 악영향을 미치는 간접적인 파급효과가 예상된다.
외국인 투자자금이 대거 이탈할 가능성은 높지 않더라도, 이머징마켓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되어 당분간 신규 유입이 부진한 모습을 보이면서 환율 및 증시불안이 지속될 가능성도 있다. 장기적으로 국내경기가 호전될 경우 여타 개도국의 금융불안으로 인한 차별화의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나, 당장은 국내경기가 부진한 관계로 이를 크게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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